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획특집
임진왜란때 구국에 앞장선 忠節의 崔氏三忠
기사입력: 2018/02/26 [18:28]  최종편집: 대구영남매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운영자
▲     © 운영자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반만년 동안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찬란한 역사의 금자탑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도 그중에 하나다. 이 당시 나라는 지금의 정치꾼들이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는 당리당략만을 위해 싸움질만 하는 것과 같이 사색당파 싸움에 정신이 팔려서 나라가 썩어 문드러지는것도 몰랐다.
율곡선생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10만 양병설을 주창했지만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율곡선생이 앞날을 읽는 수는 감동 그 자체다. 싸움질만 하다가 왜적이 침입하자 임금부터 도망가는 촌극은 코미디같았다. 임금이 도망가는 마당에 일개 관원들이야 어찌 애국심이 있었겠는가. 섬나라 오랑캐들이 파죽지세로 부산에 상륙하자 앞장서서 나라를 지켜야 할 관원들은 처자식을 먼저 챙겨 도피하기에 바빴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의지할 곳 없는 백성만이 혼란에 빠졌다. 범에 물려가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뜻 있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만약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의병들이 없었더라면, 그 당시에 우리는 일제의 속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라를 위해 애국충정한 의병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날 우리가 이렇게 건재하고 있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이지역에서도 구국일념의 경주최씨 가문의 삼충(三忠)도 그때 분연히 일어난 의사들이다. 삼충이란 공산의병장을 지낸 최인(崔認)선생, 대구의병장을 지낸 최계(崔誡)선생, 공산관군장을 지낸 최동보(崔東輔)선생이다.
최인선생과 최계선생은 형제지간이고 최동보선생은 종자이다. 임진왜란때 이렇게 삼숙질간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가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의 공적은 정말로 청사에 빛날 정도로 혁혁하다. 최인선생은 선비였지만 붓을 꺾고 대신 칼을 잡았고 최계선생은 무과에 급제해서 국록을 먹으면서 대구의병장이 되었다.
조카 최동보선생도 안동 등 북부지방의 유림들이 알아주는 큰 학자였지만 두분의 숙부와 함께 공산관군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최계선생은 그 당시 임진란과 정유재란때의 공적으로 선무이등공신에 책록되었지만 최인선생과 최동보선생은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한 애석함이 많았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00년 후 동해가에서 발견된 해상신협에서 그 공적이 낱낱이 들어난 것은 천만다행으로 늦게나마 명예회복을 하게 되었다.
전국의 사림(士林)들이 들고 일어나 상소했고, 그 당시 관찰사가 임금께 주청하여 최인선생은 사헌부지평, 최계선생은 병조참판, 최동보선생은 호조참판을 추정 받았다. 이 두분이 명예회복을 하기 전에 최계선생은 별묘를 지어 배향하고 있었다. 뒤늦게 명예회복을 한 최인선생과 최동보선생도 유림들의 뜻에 따라 평천서원(삼충사)를 지어 세분을 합사하여 배향했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평천서원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게 되었다. 3분의 삼충이 한자리에 배향되기 전에 최계선생은 별묘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향되고 있지만 두 분의 충신은 거리를 배회하고 있어 뜻 있는 이들의 가슴을 저미게 하고 있다.
정몽주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은 정부가 400억을 들어 충혼을 달래고 있지만 삼충은 200년 넘게 홀대를 받고 있어 너무나 대조적이다. 정몽주선생은 한명의 왕을 위해 목숨을 버렸지만 삼충은 왜적이 침입한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 뭔가 잘못된 일이 아닌가싶다.
오늘날 각 지방정부는 올레길, 건강센터 등등에는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지만 정작 나라를 구한 충절의 삼충이 계셨는지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
본지 사장인 최성덕 박사는 최계선생의 14대손이다. 최박사는 삼충사 복원 및 삼충공원 조성을 위해 수 십 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해상신협에 기록된 삼충신의 행적이 역사교과서에 기술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최언돈 박사와 고운사랑방운동연합회원들이 힘을 보태고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 많은 문중원들이 관심을 갖고 있어 삼충을 환하게 웃게 할 날도 머지않아 꿈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보여진다. 하루빨리 삼충사가 복원되길 기원해본다.
이제 국가와 지방정부도 더 이상 홀대하지 말고 삼충사를 복원하고 삼충공원을 조성하여 이분들이 만인의 귀감이 되게 하고 역사적인 교훈을 일깨워서 나라사랑의 이정표로 삼아야할 것이다. 또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는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우상이 되게 해야 삼충의 충절이 빛바래지 않을 것이다. 삼충은 어떤 인물이며 행적은 무엇인지 이분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지를 우상이 없는 이 시대에 있어 삼충의 충절을 재조명해본다.
 
□ 삼충(三忠)의 세계, 약력, 임란창의 행적
 
○ 삼충의 세계(世系)
삼충이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에 앞장 선 충절의 최인(崔認), 최계(崔誡), 최동보(崔東輔) 등 이 세분 충신을 뜻한다. 최인과 최계는 형제지간이다. 최인이 형이다. 최동보는 종자다. 최동보는 최인, 최계의 백씨인 신와공 최겸의 장자이다.
삼충의 본관은 경주이다. 신라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이다. 문신의 집안이 무인으로 바뀐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삼충의 중시조는 병조판서 광정공 최단이다. 1세 최단은 고려말 1388년 요동정벌 때 안동대원수로서 이성계 휘하로 전투에 나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그 후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와 함께 상주에서 왜적를 격파한 혁혁한 공로가 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과 삼등공신으로 제수되었다.
실묘를 해서 대구시 동구 도동 최치원선생 영당 옆 제단에 모셔져 있다. 매년 후손들은 3월 3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2세는 재전이며 양산군수와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최단과 함께 실묘를 했기 때문에 고(考)와 함께 제단에 모셔져있다.
3세는 맹산현감을 지낸 맹연이다. 이 분이 바로 강화도에서 대구로 와서 입향한 입향조다. 4세는 한성참군 한, 5세는 선공감역 자하이다. 6세는 어모장군 발포만호인 해이다. 7세는 종옥으로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내금위를 지냈다.
종옥은 겸, 인, 계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병조좌랑 겸은 맏이로 효행이 뛰어났다. 우락제공 최동보는 최겸의 아들이다.
이와 같이 삼충의 세계를 훑어보면 문인보다는 무인의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한청공 최인의 약력, 임란창의 행적
한천공(寒川公) 최인(崔認)선생의 자는 달부(達夫), 또는 사인(士人), 호는 한천이다. 명동파의 분파조다. 명종 13년 기미년(1599년)에 태어났다. 타계한 날짜는 미상이다. 무슨 연고가 있어 보인다. 산소는 지묘동에 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효심이 깊어 미래의 동량으로 기대를 모았다. 불골사에서 당대의 명현인 동강 김우옹, 간재 이덕홍, 지산 조호익, 여헌 장현광 등과 함께 동고강학을 했다. 선생은 무인이라기보다 문인이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붓을 꺾고 계시 최계와 종자 최동보와 함께 칼을 잡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학봉 김성일이 선생을 공산 의병장에 임명했다. 선생은 임진(1592) 2월에 왜적이 침입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계시 태동공 최계, 박수영 등 애국충정에 피가 끓는 지사와 오강(현 아양교 부근) 금정에서 회동하여 창의하기로 굳게 결의하고 붓 대신 칼을 들었다. 그 결기는 대단했다고 전하고 있다.
선생은 화원, 월배, 팔조령쪽을 지켰다. 복병의 명수인 선생은 남쪽에서 북상하는 왜군들과 싸워 대승을 했다. 크고 작은 승리는 한 두번이 아니었다. 선생은 곽재우 장군이 수성하고 있는 화왕산성을 침공하기 위해 가등청정이 졸개들과 구름떼같이 쳐들어오자 우락제공과 함께 6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참전하여 화왕산성을 지키는데 수훈을 세웠다.
이때 선생은 종자 동보에게 “우리집안은 대대로 국록을 받았는데 그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기회는 바로 이때다. 나는 오직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겠다”고 유언과 같은 말을 하면서 섶을 쌓아 방화(放火)하여 죽기를 다짐하면서 싸움에 임했다.
요즘으로 치면 IS와 같은 자살특공대 같은 역할을 했을 만큼 자신을 바칠 순교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기가 화왕산성 승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태동공 최계선생의 약력, 임란창의 행적
최계(崔械)선생의 자는 사훈(士訓), 호는 태동(洞)이다. 정묘(1567년) 7월 21일 지동마을(현 대구시 동구 도동 갓골)에서 태어나 1622년 11월 10일 타계했다. 향년 56세다. 종옥선생의 셋째아들이다. 묘소는 팔공산에서 3대 명당이라고 하는 동봉에 올라가다가 좌측 양지바른 자리에 만년유택이 있다. 어릴 때 부터 총기가 뛰어나고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춘 상이었으며 불의는 참지 못하는 성품을 지녔다. 선생은 신묘년(1591년)에 무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첫 보직은 훈련원 봉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병기와 군량미를 비축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중씨 최인과 종자 최동보와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을 섰다.
선생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선생은 임금에게 백성들을 모집하여 의병을 삼을 것을 청한 상소를 올리고 향중의 친구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의병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그 내용을 보면 “의병은 임금의 군사다. 임금의 신하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두렵단 말인가. 때를 맞추어 창의하자”고 설득했다. 팔공산 오도암에 피란 가있는 사람들에게도 격문을 띄워 의병에 합세할 것을 호소했다. 선생은 학봉 김성일로부터 대구의병장에 임명 받았다.
선생은 초유사 김성일에게도 “최근 도내 의병들의 궐기로 인하여 적의 형세는 점차 꺾여가고 있고 우리의 사기는 바야흐로 떨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군은 항적의 의지가 없어 성에서 나와 산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고 식솔들을 이끌고 숲속으로 숨어 성에는 창을 잡을 사람이 없습니다”고 관군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만 보아도 선생의 우국충정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비를 털어 군량에 보태고 노비들을 의병으로 참여시켜 구국에 앞장서자 관군은 많이 반성하고 그때에야 창과 칼을 잡기 시작했다. 또한 산속에 숨어 있던 백성들도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의병에 참여하는 숫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선생은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고 상대를 설득시키는 힘이 대단했다.
선생은 왜적과 맞붙으면 백전백승하기 때문에 왜적들은 선생의 이름만 들어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왜적들은 공이 지키고 있는 금호강에서 팔공산, 칠곡, 경산 등지에서는 겁을 집어 먹고 감히 금호강 이북을 지나치지 못했다. 학봉선생이 이런 사실을 조정에 알려 1596년 주부(主簿)에 승진되고 황신과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도 다녀왔다. 1605년에는 선무 2등공신에 책록되고 판관으로 승진되었다. 1607년에 만경현령 재임시 군민들이 부모와 같이 존경하고 송덕비도 세워 칭송했다. 임지를 떠나올 때 키우고 있던 오리가 몇 마리인지도 기록에 남기고 돌아올 정도로 청백리의 삶을 살았다.
만경현령에 임명된지 3년 만에 교체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토사구팽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무인에 대한 차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가풍을 무인에서 문인의 집안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즉 변무위문(變武爲文)이다. 이러한 결심에 따라 자식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선영이 있는 조상의 묘 옆에 공부방을 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자식들이 밖에 나오지 못하게 훈육했다.
선생은 3자를 두었는데 모두 한강 정구선생 문하에 보내어 수학하게 했다. 맏이 동율은 생원, 둘재 아들 동집과 셋째 동직은 성균관 생원으로 대과에 합격시켜 무인의 가풍을 일소하고 문교(文敎)의 징검다리를 놓았다. 특히 둘째 아들 옻골입향조 대암공 최동집 선생은 학문이 뛰어난  효종임금의 대군시 사부였다. 본지 사장인 최성덕 박사는 선생의 후손이다.
이후 태동공 최계선생의 후손들은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 영남의 삼로인 백불암 최흥원 선생도 태동공과 대암공의 후손이다. 현재는 여백 최언돈 박사가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
 
○ 우락제공 최동보 선생의 약력, 임란창의 행적
공산관군장인 선생은 입실파의 파조인 이조좌랑 신와공 겸의 장자이다. 1560년 4월 4일 태어나 1625년 6월 23일 타계했다. 향년 63세다. 아들 3명과 딸이 있다. 두분의 숙부 한천공 공산의병장 인(認), 대구의병장 태동공계(誡))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자는 자익, 호는 우락제(憂樂齊)이다. 이목이 수려하고 비범하고 장부의 기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대기(大器)로 촉망받았다. 어릴 때에 퇴계의 문인으로 명유(名儒)이던 소암 노수는 외조부이다. 선생은 어릴때에 외조부 밑에서 수학하였다. 경사에 달통하고 병법에도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에 올랐다. 효행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 제수된 천출효자다.
특히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일반인들이 갖고 있지 않는 지감 즉 예지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임진란도 일어날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선생의 창의일기에 보면 신묘년 1591년 4월 5일 이런 내용이 있다. 크게 술잔치를 벌이고 안밖 친척과 고을 사람은 물론 노비들까지 모두 초청하여 회포를 푸는 자리를 가졌다. 즐기고 또한 슬퍼 탄식하기를 「오늘 이 얼굴들을 다시 못 만나게 되면 어이 할꼬」라고 했다. 이 말씀을 들은 숙부께서 대노하면서 「너 지금 무슨 망언 인고」라는 꾸지람을 했다. 이 말씀을 들은 좌중은 전부 놀라서 「이 무슨 말인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동남쪽에 반드시 전쟁의 걱정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때 좌중의 말이 당신의 지감이 남들보다 뛰어난 줄 알지만 사실 그런 변고가 일어나겠는가 하였다. 이어 「요사이 천문을 보니 별자리가 도수를 잃고 요약스러운 기운이 하늘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보고 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선생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예언한대로 8개월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참으로 신인(神人)과 다름없는 놀라운 지감이 아닐 수 없다.
1594년 3월 17일 밤의 일기는 선생의 지감과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일기에는 여러 제장들과 모래를 모아서 산과 골짜기를 만들고 손가락으로 지도를 그리는 작전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뛰고 다리가 떨리면서 땀이 비오듯 나서 옷을 적시는 현상이 일어났다. 선생은 곧 부모를 뵈오려 집으로 향했다. 집에 이르니 어머니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머리를 숙여 하늘에 빌고 변을 맛보고 아픈 곳을 혀로 햝았다. 손으로 가슴을 쳐서 흘러나오는 피를 그릇에 받아 입속으로 넣어드리니까 점차 회생하는 것 같았다. 또 다시 토한 피를 연달아 드리니 이튿날 말문이 트이고 미음(米飮)을 넘기시면서 점차 회복하였다. 선생은 천출 효자임이 분명했다.
선생의 휘하 백상엄 좌부감군의 일기에서 보면 삼충신 중 가장 용모가 뚜렷하게 기술되어 있어 곧바로 대면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눈빛은 사람을 뚫어보고 쏘았다. 음성은 웅장하여 산천초목을 울게 하고 키는 크고 우뚝하며 귀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크니 참으로 장수의 그릇이었다. 매우 대범하고 분별없이 남의 말에 따르지 않았고 사사로이 윗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적시하고 있다.
선생의 난중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몇 개를 추려 소개한다. 1591. 5. 15일 원근 각고을 사람들이 대송정에 모였다. 나 또한 두 숙부를 모시고 갔다. 이때 모인 사람은 권응수, 서사원, 장몽기, 조경, 서재경, 서사검 등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1591년 3월 19일 밤 병들어 몰골 없는 백마(白馬) 한 마리가 울면서 들어오므로 나가서 메어두다 며칠이 지나도 찾아오는 주인이 없었다. 잘 거두어 먹였더니 날래기가 나는 용같고 달리기는 흐르는 별 같아서 아무도 길들일 사람이 없었다.
1592년 4월 21일 붉은 비단치마 아홉폭으로 큰 기를 만들어 그 위에 흰글씨로 대송장군이라 쓰고 허벅지를 찔러 피를 내어 군중에게 맹세하며 말하기를 「너희들 만약 내 명령을 어기면 이와 같으니라」고 말했다.
1592년 4월 22일 무리를 거느리고 반야월에 진을 치고 적을 막았다. 다음날 또 싸워서 삼구에서 왜적 머리를 배기를 수십급이나 되었다. 나머지는 밤을 타 달아났다.
1592년 4월 26일 적병 수백이 해안(현불로, 동촌, 방촌동 일대)에 주둔했다는 보고를 받고 거침없이 공격하여 화담에서 대파했다. 총과 긴 창 50자루를 빼앗고 나머지 진귀한 보물들은 여러 군사들에게 상금으로 나누어주었다.
1592년 8월 23일 단석산을 지나면서 김유신장군의 유적을 보고 글을 지어 올리다 밤중 꿈에 훤칠한 노인이 나타나서 은투구에 금갑옷을 입고 등 뒤에 八人(火)의 글자를 크게 써붙이고 갔다.
1592년 8월 25일 새벽 나머지 병사 100명을 거느리고 싸워 쏘아죽인 적병이 수십인, 벤 머리가 16급, 당현까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1593년 2월 21일 순찰사 한효순이 일곱조의 군대를 당교(문경)에 모이도록 거느린 병사를 이끌고 가서 남은 적을 크게 깨트리고 돌아오다.
1593년 7월 초하루 군사를 조련하여 신령에 진군하여 방어사 권응수 및 은진현감 이곡과 함께 창암에서 적을 쳐부수다.
1597년 7월 초 9일 들리기로 우방어사 곽재우가 화왕산성에 진을 친다고 해서 가묘에 고하고 숙부와 함께 제장수 및 병사를 거느리고 가다.
1597년 7월 12일 화왕산 밑에 다다른 권흡 등 여러 고을의 50여명의 의병장들이 모였다. 정유년 1597년 7월 17일 새벽 모든 의병장들이 각자 병법을 시험하다 숙부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이 대대로 녹(綠)을 받은 신하로써 티끌만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오직 이곳에 있으니 힘을 다해 죽기로 싸우는 것이 곧 내 한마음뿐이니 너도 그렇게 힘쓰라고 말씀하셨다.
1957년 8월 10일 적의 우두머리인 가등청정이 진해로부터 병졸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곽재우가 군사가 적음을 표시내지 않기 위해 사납고 용맹한 10여명을 차출해서 붉은 옷을 입히고 흰 말에 태워 산골짜기에 흩어져 있으면서 숨어서 다시 보이게 하는 적의 교란술을 썼다. 나도 곧장 내 달아 쫓아가서 앞 고갯마루에 섰다가 적들의 총탄에 맞아 말 앞에 떨어졌다. 이때 말이 옷깃을 물고 본 진영으로 되돌아왔다. 왜적들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크게 놀라 기이하고 신기하게 여겨 감히 싸움을 재촉하지 못하고 이에 강을 건너 물러갔다.
이상은 해상신협에서 나온 우락제선생의 창의일기에서 몇 개 발취한 것이다. 창의 일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생은 참으로 대단한 전공을 세웠다. 흰 말이 집에 굴러 들어온 것이나 대송장군이란 호를 쓸 때 신인이 나타나 인가해주기도 하였다. 단석산에서 김유신장군에서 고유제를 지내자 꿈에 신인이 나타나 화공전술을 쓰라고 해서 화공전법으로 적을 대파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화왕산성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떨어지자 흰말이 옷깃을 물고 살려낸 이적들을 보았을때는 선생은 하늘이 임진란을 위해 쓰기 위해 내려 보낸 분이 아닐까 싶다. 선생의 공적은 곽제우와 권응수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 선생의 둘째아들 여호는 호가 병족당으로서 문장이 탁월하고 말타고 활쏘기도 잘했다. 임진왜란때 선생의 군진에 종사하여 전략과 전술을 잘짜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도록 했다.
병자호란때 금천에서 순절하여 공조참판에 중직되고 선생과 함께 절의록에 들었다. 이후 후손들이 쇠락하여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 논공행상의 진실과 허상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적사실이 왜곡되거나 공적이 많아도 공정하게 잘 집행되지 않고 있다. 임란때도 이러했다. 조선시대에는 무인에 대한 차별이 도가 넘었다. 큰 공적을 세웠던 의병장들은 전후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당했다. 문신들의 붓 끝에 놀아났다. 임진 때 공신으로 책록한 사람은 문신·무인 포함해서 총 104명이다. 이중에는 무인은 18명밖에 되지 않았다. 무능하고 의심병이 많은 겁쟁이 선조를 따라 피난을 갔던 문신들이 독차지했다. 1등 공신도 문신들의 독무대였다. 무신은 단 한명도 1등 공신에 책록되지 못했다.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곽재우도 전쟁이 끝나자말자 곧바로 의병을 해산하고 산으로 몸을 숨겼을 만큼 논공행상은 간신배들이나 문인들의 먹이감이였다. 삼충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대구의병장 태동공 최계선생은 선무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최계선생이 대구의병장 당시 무과에 급제하여 국록을 먹고 있었고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최계선생의 공적사항을 조정에 소상히 알려주었다. 또한 정유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임금 앞에서 4개도의 병사가 열병식을 할 때 그 병사를 총괄 지휘하는 지휘관이 되어 일사분란하게 훈련을 잘 소화시키는 것을 보고 선조가 감동받고 최계선생에게 말 한필을 하사 할 만큼 훌륭한 장군으로 인정한 것도 한 몫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계선생은 조정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조정에서도 황신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함께 보낼 만큼 최계 선생은 조정의 신임도 두터웠다. 하지만 한천공 최인선생과 우락제공 최동보선생은 공신록에 책록되지 못했다. 선생이 포상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은 참으로 천추에 뜻 있는 선비들의 유감으로 남아있다. 귀신같은 꾀와 기이한 계책, 전략 전술은 홍의장군 곽재우와 화산군 권응수에게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포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공이 너무 대쪽같은 성품 때문에 방백수령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공적사항을 누락시킨 점과 불행하게도 경주·영천·나현전투에서 300여급을 베고 수십명을 쏴죽인 사실을 비장 서사겸을 시켜서 임금에게 승전보를 전하도록 하였으나 사검이 조령에서 왜적에게 잡혀 죽으므로써 조정에 알리지 못한 애석한 점도 있다.
그 당시 관찰사, 병마사가 전공을 기록하여 조정에 올릴 때 유독 선생에게 유감을 갖고 기한이 지났다고 거절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이눌(李訥)이 선생에게 속이 상하지만 조금만 굽힐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선생은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이고 장부가 할 일이니 지금 공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절개를 굽히도록 시키는 것은 결코 뜻 있는 선비의 입에 올릴 일이 아니고 그대는 그만두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선생의 절개는 참으로 대단해서 엎드려서 절 받기는 죽음보다도 더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굽혀들어오기를 바랬던 관찰사와 병마사는 이런 선생의 단호함을 보고 영원히 공신록에 들지 못하도록 했다. 선생은 영천창수에 물러나 전공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산건야복(山巾野服)으로 유유자적하게 말년을 보냈다.
 
○ 삼충을 빛보게 한 해상신협의 세상 출현
삼충의 절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 200년 동안 그 공적이 없었는데 동해변 장기현에 있는 허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헛간에서 발견됐다. 이 집안에서도 식구가 병이 나거나 우환이 생길 때는 사당에 빌듯이 헛간에 있는 상자에 빌었다. 신처럼 모셔두고 두려워서 감히 치우지 못한지 수세가 지났다.
간지에 정(丁)자가 든 해에 허씨 할머니의 한 아들이 병이나 다리를 절룩거렸다. 점쟁이의 말이 병이 그 상자 속에 있으니 그 헌 상자를 태워버리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그 상자를 꺼내어 태우려고 그 속을 보니 몇권의 책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이웃에 사는 한 선비에게 고했다. 선비와 함께 상자 속에 감추어 둔 것을 보니 임진왜란때 창의록이었다.
이눌공 김응하공과 우락제 최동보공의 글씨였다. 드디어 가지고 와서 세상에 전하니 세상 사람들이 「해상신협(바닷가 귀신 상자 속에 든 글)」이라고 말했다.
당시 영남 여러 의사(義士)들이 모두 그 기록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씨 삼충의 일이 더욱 현저하였다. 북인들의 농단과 방백들의 시기질투로 삼충의 공적은 역사의 어둠속에 묻혀버렸다. 삼충의 창의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영남선비들 속에서 끊일락 말락 할 지금에 이르러도 아무도 현창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백년동안 궁벽한 곳에 감추어진 물건이 되어 비바람에 찢기지 않고, 벌레와 쥐가 쏠지 않고, 어둠속에서 묻혔다가 다시 200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서 과연 그 누가 전해주는 것이며 그 누가 비장한 것이냐 그 일이 참으로 기이하지 않는가. 처사공은 공산의 병장이었고 현령공은 대구의병장이며 우락제공은 공산관군장으로서 기호는 대송장군이었다. 이눌공은 호가 낙의재로서 기호는 천사장군, 김응하공은 호가 인심재로 기호를 분용장군이라 했다. 이 두분은 경주사람으로 삼충과 함께 생사를 함께했다.
임란 창의 사적을 세인들이 비로소 상세히 알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해상신협이라 했다. 이 해상신협기는 당대 문장가인 수동파 두와공 최흥벽 선생이 창의사실을 정리기록하여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최흥벽선생은 해상신협기를 통해 역사 속에 묻혀있던 삼충을 현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삼충의 명예 회복
해상신협에서 묻혀있던 삼충의 창의록이 세상에 나오지 사림은 깜짝 놀랐다. 사림(士林)에서 들고 일어나 한 집안의 층의가 뛰어나서 빛나는 이는 도내(道內) 대구부(大丘府)의 세분뿐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뛰어난 충의로 하여금 조정의 포전을 받을 수 있도록 진정했다. 이에 따라 영남도관찰사는 다음과 같은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엎드려 아뢰오니 대구의 고현령 최계가 그 중형 인과 조카 동보와 더불어 임진왜란을 당하여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읍사람들이 서로 잘 따르고 초유사 김성일이 계를 대구의병장으로 삼아서 금호강에서 적을 깨트려 목 벤 것이 매우 많았고 적들이 성산에 달아났습니다. 좌감사 김성일이 조정에 포상 할 것을 아뢰어 주부로 승진시키니 계가 명을 듣고 즉시 용만에 부임하여 임금님께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대가(임금이 탄 수레)가 환도 한 후에도 바닷가의 적세가 아직도 치열하여 계가 또다시 동보와 함께 병사를 모아 나머지 왜놈을 쳐부수었기로 선무원종 이등공신으로 녹훈 되었사옵니다. 또 황신을 따라 왜국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만경현령에 임명되어 명성과 공적이 크게 드러났아옵니다. 광해군의 정사가 혼미하게 되자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인은 동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나누어 공격하여 대구에서 크게 이겼사오며 또한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같이 지켜서 여러번 기특한 전공을 세웠사옵니다.
동보는 평소 기발한 지식이 있어 천문을 보고 미리 왜적의 난리가 있을줄 알아서 양곡을 모우고 칼을 만들어 갑작스런 일에 대비하였아오며, 급기야 전란이 일어나자마자 전우들을 규합하고 집안 종들을 거느리고 대송정에 모여서 비단폭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대송장군이라 써서 허벅지를 찔러 피를 내어 맹세하고 왜적에게 진격하여 여섯 번 싸워 모두 이겼아옵니다. 관찰사를 따라서 당교에서 적을 쳐부수고 또 이곡, 이눌, 권응수 등 여러 의병장과 더불어 창암에서 왜적을 깨트렸사오며 또 화왕산성에 가서 적을 공격함에 용맹스럽게 먼저 오르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말 앞에 떨어졌사오며 말이 옷깃을 물고 본전에 돌아와서 드디어 생명이 온전함을 얻었사옵니다. 그 후에도 또 다시 병마사를 따라가서 무게에서 적을 깨트렸사오며 영천 창수에 물러나 숨어서 스스로 호를 우락재라 하고 입으로 전날의 전공을 말하지 않고 생을 마쳤으므로, 청하오니 포상하여 증직을 내려 명성을 세우소서.
 
조정에서는 왕의 윤허를 받아 한전공 최인을 사헌부지평, 태동공 최계를 병조참판, 우락제공 최동보를 호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이러한 삼충이 나라에서 인정받자 사림(士林)에서는 평천서원(삼충사)를 지어 3충신을 배향했다. 평천서원을 건립하기 전에 이미 태동공 최계선생은 현종정미년(1667)에 별묘를 지어 봉사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안타깝게도 평천서원도 철거가 되었다. 현재 최계선생만 별묘에 봉향하고 있다.
후손들은 하루빨리 평천서원을 복원하여 삼충신을 한자리에서 향례를 지내도록 하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가 아닐까싶다.
 
○ 결어
성씨가 다른 문중에서도 윗대는 싹둑 잘라버리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할배가 최고라고 해서 윗대 조상을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문중원들간 갈등을 하는 것을 많이 보고 있다. 바로 직계 조상만 잘나고 훌륭하다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은 참으로 불경스러운 일이다. 만가지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파가 갈리면서 자기파 조상만 현창하는데 몰입하고 있다. 그 조상을 있게한 선조를 무시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병폐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못난 행위는 바로 이런 행위이다. 자신은 상것 짓을 하면서 훌륭한 조상을 팔아 잘난체하는 것은 조상을 욕보이는 소인배다. 진짜 양반은 두루 두루 조상을 받드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윗대 잘난 할배를 팔아 자기 생색을 내면서 우쭐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불쾌감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소인배 문화는 고쳐야 할 것이다.
최씨 삼충의 집안도 묘정비각을 보면 비슷하다 보여 지고 있어 옥의 티가 아닌가 싶다. 묘정비각을 끌로 부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보여 진다. 지금이라도 후손들은 조상 경중을 저울질 하거나 우열을 가리는 일은 하지 말고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것이 조상을 잘 섬기는 행위가 되리라고 본다. 이 지역이 배출한 명문의 경주 최씨 삼충을 잘 현창하여 역사적인 기념비가 되도록 하는 것은 최씨 문중원들의 몫이라고 사료된다. 양승대기자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인기기사목록